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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une 13, 2020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나는 재개발지역 고양이입니다' -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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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나는 재개발지역 고양이입니다"

이주하며 버려진 재개발지역은 전쟁터
동물보호, 도시정비 조례로는 전국 최초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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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나는 재개발지역 고양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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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6-12 11:45:53수정 : 2020-06-13 08:29:47게재 : 2020-06-1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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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찍힌 고양이의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최명환 씨 제공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찍힌 고양이의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최명환 씨 제공

재개발사업은 노후·불량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행합니다. 재개발지역은 부산에만 130여 곳, 전국적으로는 2000여 곳에 달할 정도로 많습니다. 사람들이 떠난 폐허 같은 그곳에 버려져, 하루하루 죽어 가는 생명이 있습니다. 최근 재개발지역에 사는 이들 길고양이를 보호하는 내용의 조례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산시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그동안 재개발지역 길고양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를 1인칭 시점의 '뉴스 요리'로 꾸며 봤습니다.

길고양이에게 재개발지역은 전쟁터와 다름없다. 최명환 씨 제공 길고양이에게 재개발지역은 전쟁터와 다름없다. 최명환 씨 제공

■길고양이에게 재개발은 재난

나는 재개발지역 길고양이입니다. 처음부터 길고양이는 아니었습니다. 원망도 했지만 이제는 우리 가족이 말 못 하고 떠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마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헤어지며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처음 사흘은 울기만 했습니다. 밥도 없고, 물도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네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버림받은 고양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길고양이 선배들로부터 우리 마을을 사람들이 재개발 정비사업지구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길고양이에게 재개발지역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깨진 유리 조각이 파편이 되어 사방에 떨어져 있습니다. 발에 상처를 입어 절뚝거리는 고양이가 많은 이유입니다. 날씨가 더워지며 음식물이 쉽게 상하니 병이 나기에 십상입니다. 물까지 귀해 탈수 증세를 보이는 친구도 있습니다.

뾰족한 함석지붕과 철삿줄이 뒤엉킨 위험한 곳에서 고양이들이 놀고 있다. 최명환 씨 제공 뾰족한 함석지붕과 철삿줄이 뒤엉킨 위험한 곳에서 고양이들이 놀고 있다. 최명환 씨 제공

우리를 도와준 캣맘이 없었다면 저도 벌써 무지개다리를 건넜을지도(반려동물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 모릅니다. 스스로 이사할 생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는 떠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떠난 몇몇은 일찍 자리를 잡은 고양이들의 텃세에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고양이에게 재개발은 가족과 집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재난입니다. 곧 닥쳐 올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를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이대로 매몰되어 생을 마감해야 할까요. 혹시 운 좋게 새 아파트가 지어질 때까지 견디면, 새로 들어온 주민들은 우리를 받아줄까요.

최명환 씨가 사진을 찍기 전에 길고양이와 교감을 나누고 있다. 최명환 씨가 사진을 찍기 전에 길고양이와 교감을 나누고 있다.

■동네의 일원… 같이 살 수는 없나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캣대디, 최명환이라고 합니다. 재개발지역에서 데려온 고양이들을 집에서도 잘 키우고 있습니다. 길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재작년부터였습니다. 해운대구 반여동 재개발지역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5월까지 떠나라고 하는 공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3월이었는데 갈 곳이 없다는 할머니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재개발지역을 떠나지 않으려고 쇠사슬에 몸을 묶고 버티는 분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여름이 되어 다시 가보니 다 떠나고 고양이들만 쓸쓸하게 남겨졌습니다. 반여동은 자연녹지가 근처에 있어 고양이들에게는 여건이 나은 편입니다. 동래 재개발 지역은 너무 처참합니다. 반여동도 그대로 놔두면 동래처럼 될 것 같아서 동물단체, 정당, 구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재개발지역 공사장에서 새끼 고양이들이 놀고 있다. 최명환 씨 제공 재개발지역 공사장에서 새끼 고양이들이 놀고 있다. 최명환 씨 제공

그러다 캣대디 한 분을 만나 고양이 밥 주는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하지만 고양이도 이곳에 오래 살았으니 동네의 일원입니다. 사람들이 재개발하며 고양이를 밀어내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같이 살 수도 있지 않나요. 길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고양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mirthlandir)에 올렸습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는 수정갤러리에서 고양이 사진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고양이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가까운 거리 확보가 필요합니다. 일 년 동안 밥을 주면서 가까워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젠 누가 아픈 고양이인지도 쉽게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요즘엔 재개발지역 고양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공사장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크레인 기사가 건물을 허물기 전에 미리 땅을 몇 번 쳐주면 고양이들은 피신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방치된 재개발지역 길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동물학대방지연합 김애라 대표가 남언욱 시의원(오른쪽)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동물학대방지연합 김애라 대표가 남언욱 시의원(오른쪽)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아쉬워

저는 부산시의회 해양교통위원장 남언욱 시의원입니다. '반려동물 1000만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생명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요즘 세상에 처음부터 야생에 사는 고양이나 개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다 버린 거지요. 겨울철 밤늦게 집에 들어가며 길고양이가 눈에 밟혀 안고 가서 재운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비록 아내에게 혼은 났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는 그런 게 아닐까요.

2018년부터 캣맘들이 찾아와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재개발 현장에 가보니 공사 관계자들도 길고양이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제도적으로 개선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처음 계획은 동물보호법에 길고양이 보호를 조례로 넣는 것이었습니다.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 짓는 게 중요하지, 무슨 고양이 문제까지 신경을 쓰나. 심지어 그런 조례를 만들면 건설 경기를 위축시킨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지방자치법에 '주민의 권리 제한 또는 의무 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 정할 때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발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위법이 있어야만 조례를 만들 수 있다니, 지방자치제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비슷한 조례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부산에서 재개발사업을 하려면 길고양이에 대한 안전이 확보되어야 한다. 최명환 씨 제공 부산에서 재개발사업을 하려면 길고양이에 대한 안전이 확보되어야 한다. 최명환 씨 제공

일 년 반 넘게 씨름을 하다 보니 동물보호법으로는 안 되더라도, 도시정비 조례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길고양이 관리계획을 도시정비계획에 넣는 것입니다. 동료 의원들에게는 '재개발지역에 한번 가보자, 고양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라고 설득했습니다. 건축 최종 허가권자인 구청장이 정비구역 내 동물 보호 계획을 세워야 하고, 부산시장은 동물 보호 계획을 정비계획 수립 때 포함하도록 권고하는 조례를 발의해 결국 통과시켰습니다. 강제가 아닌 권고에 그쳐 다소 아쉽기는 합니다. 그래도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이 많이 변화했기 때문에 도시 정비계획에 동물 보호를 조례로 넣을 수 있었습니다.

■에필로그

이달 말부터 부산에서 재개발 사업을 하려면 길고양이의 안전이 확보돼야 합니다. 지자체장은 관련 대책이 미비하다고 판단되면 공사 관련 허가를 보류할 수 있습니다. 동물 보호를 도시정비 조례로 넣은 것은 전국에서 처음이라, 타 지자체에서도 많이 궁금해합니다. 사실 재개발지역 공사로 건설업체가 이익을 보니, 보호 대책도 이들이 세우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재개발지역 길고양이 보호는 '공존'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온 데는 지역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의 수고가 컸습니다. 그런데 부산시민들도 이름난 서울지역 동물보호단체에만 후원을 집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의 동물보호단체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야옹~.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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