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외식은 그리 반길만한 일이 아니다. 주부들에게 가장 맛있는 밥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차려준 밥’이라지만, 미국에서만큼은 아니다. 미국 식당의 음식값은 한국보다 비싸고, 세금도 따로 붙으며 서빙을 담당하는 서버에게 팁도 따로 줘야 한다. 4인 가족이 한번 외식하고 나면 고급 식당이 아님에도 6~8만 원은 쉽게 쓴다.
게다가 코로나19 때문에 어지간하면 외식은 피해야 하는 상황. 집밥 의존도가 높아졌다. 그렇다면 ‘배달’이라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싶겠지만, 미국에서는 배달료와 수수료만 하더라도 5000원 이상이고, 배달원에게 팁도 따로 줘야 한다. 한국의 배달 문화에 익숙한 나로선 선뜻 배달 주문에 손이 가지 않는다. 또, 마찬가지로 미국의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하기에 배달 음식도 꺼려진다.
밥.밥.밥…. 주부가 되는 순간 애증의 존재로 변해버리는 밥. 날이 더우니 요리하기는 더 고되고, 아이들 입맛은 까다로워진다. 늘 다양한 반찬으로 정갈하게 식탁을 수놓던 친정어머니가 더 존경스러워진다.
◇ 점심 먹으며 “저녁 뭐 먹지?” 저녁 먹으며 “내일 뭐 먹지?"
미국의 인류학자 앤 앨리슨(Anne Allison)은 일본의 ‘도시락(Obento)’ 문화를 연구하며, 도시락을 준비하는 행위가 어떻게 ‘여성 됨’, 특히 ‘어머니 됨’의 상징이 되는지, 더 나아가 도시락을 준비하는 과정이 어떻게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과 공적 담론으로 확장되고 이행된 것인지를 지적한 바 있다.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또 음식을 먹게 하는 엄마의 행위는 많은 문화권에서 어머니로서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작은 도시에서, 제한된 재료로 요리해야 하고, 코로나 때문에 외식 찬스도 못 쓰며 삼시 세끼를 빠짐없이 챙겨야 하는 이 상황은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이 부담감에 더해 식사를 제대로 못 챙길 땐 자책감까지 느끼는데, 이 감정이 몹시 불편하다.
우리 집 아이들은 밑반찬을 즐기지 않고, 한번 식탁에 오른 음식은 다음 식사에선 거의 먹지 않는다. 그래서 무조건 다양한 메뉴를 겹치지 않게 줘야 한다(요즘 그래서, 아들이든 딸이든 나중에 배우자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도록 요리를 많이 가르쳐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본다).
밥상 아이디어가 고갈된 나는 매일 “이따 점심 뭐 먹지?”, 점심 먹고 나면 “이따 저녁에 뭐 먹지?”를 입에 달고 살았다. 오랜 고뇌와 번민 끝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메뉴를 ‘브레인스토밍(Brain Storming)’하는 것이었다.
일단 아이들이 평소에 잘 먹는 메뉴들을 순서대로 적고, 그 사이사이에 아이들이 특별히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가리지 않고 먹는 음식 중 건강한 축에 속하는 음식을 적었다.
그렇게, 아침 한 끼는 보통의 미국 사람들이 먹듯이 간편한 시리얼이나 오트밀, 토스트, 팬케이크와 과일로 대체하고, 아이들의 특별 요청이 있을 땐 블루베리 머핀이나 호두 파이를 구워주기도 한다.
제대로 된 제빵 도구는 없으나, 되도록 정통 조리법을 따르되, 시판 제품보다는 덜 달게 만드는 게 엄마표 빵의 포인트다. 아침부터 단 것을 먹이는 일에 더는 죄책감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 아침 잘 안 먹으려는 아이들이 뭐라도 먹으면 나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한국과 미국 영양사의 식단 샘플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뒤, 이곳에서 재료를 구할 수 있거나, 조리법이 상대적으로 쉬운 것 위주로 채워갔다. 예를 들면, 아침에는 오트밀과 과일을 먹이고, 점심에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인 참치 김밥을 먹이면, 저녁에는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덜 좋아하지만 가리지는 않는 시금치 된장국과 야채전, 달걀 장조림 등을 만드는 방식이다.
영양소를 고르게 포함한 한식을 한 끼 먹이면, 다음 한 끼는 간단하게 브로콜리와 베이컨을 넣어 파스타를 만들거나, 토르티야에 페퍼로니, 양파, 치즈를 올려 피자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메뉴 아이디어를 종이 가득히 적어놓고, 그때그때 냉장고와 팬트리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것 중 하나를 골라 먹이려고 노력한다. 이때의 원칙, 하루 한 끼는 무조건 영양소가 고르게 포함된 한식을 먹인다는 것이다.
◇ 다음 식사엔 아빠가 해준 밥 먹어보는 게 어떨까?
20대 땐 한 달 넘게 배낭여행을 다녀도 쌀밥이나 김치 생각이 안 나더니,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한식 예찬론자가 되어버렸다. 맛도 맛이지만, 한식이 얼마나 균형 잡힌 음식인지 새삼 깨달으며 늘 감탄하게 된다. 그런 한편, 한식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우리네 어머니들, 할머니들의 노동이 집약된 요리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나 역시 엄마의 정성과 시간과 노력이 오롯이 담긴 밥을 먹고 자랐지만, 그렇게 나도 엄마가 됐지만, “엄마, 오늘은 피자 먹을까?”, “엄마, 햄버거 먹을까?” 하는 아이의 요청에 은근히 기쁘다. 이렇게 ‘게으른’ 엄마지만, 엄마는 그래도 당당해지련다. 물론 피자나 햄버거도 제대로 만들려면 힘들고 어려운 음식이지만, 엄마표 얼렁뚱땅 요리라도 아이들이 잘만 먹어준다면, 먹는 동안 즐겁다면 하루 한 끼 정도는 엄마가 조금 쉬어져도 괜찮다.
참, 할 줄 안다면 아빠가 요리해도 좋다. 할 줄 모른다면 배워서 만들면 더 좋다.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고, 우리가 다시 자유로워진다면, 나도 부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칼럼니스트 이은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서 큰아이를 키웠고 현재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좋은 엄마인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으로 이미 성장해 가는 중이라고 믿는 낙천적인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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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0, 2020 at 09:4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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